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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한 신부님 연보

  • 1919년 6월 25일경북 금릉군 대항면 향천리 758번지 출생
  • 1932년(14세)대구 성유스티노 예비신학교 입학
  • 1945년(27세)12월 15일 사제서품, 부산 범일동 성당 보좌신부
  • 1947년(29세)대구 계산성당 보좌신부
  • 1948년(30세)경북 상주 함창성당 주임신부
  • 1951년(33세)해군 군종신부
  • 1959년(41세)도미 유학, 보스톤 포담대학교 대학원 교육철학과 수료
  • 1963년(45세)대구 내당성당 주임신부
  • 1964년(46세)경산성당 주임신부 부임후 본당내 결핵환자 20여명 돌보기 시작
  • 1969년(51세)경산성당 재임중 11월 결핵진단으로 마산국립결핵병원내 천주교회 사제관에서 요양 시작
  • 1969년(51세)실제인 김수환 신부님의 최연소 추기경 피임
  • 1972년(54세)요양을 마치고 대구 화원성당 주임신부 부임 후 송현동에 위치한 대구결핵요양원 환우 돌보기 시작
  • 1976년(58세)대구시로부터 대구결핵요양원인수 초대원장신부 취임 운영 시작
  • 1977년(59세)대구결핵요양원 후원회 ‘밀알회’ 탄생
  • 1978년(60세)한국가톨릭결핵사업연합회 초대 회장 신부
  • 1980년(62세)후원회지 ‘밀알’ 창간
  • 1981년(63세)미주지역 밀알후원회 조직
  • 1982년(64세)당뇨와 종창 합병증으로 서울 성모병원 입원
  • 1983년(65세)9월 28일 폐수종(肺水腫) 병발로 선종
  • 1984년선종후 송현동 소재 대구결핵요양원 현대식 결핵병동(3층) 완공

깨진 독에 물을 붓던 어리석은 사제김동한 가롤로 신부 일대기 요약본

일찍이 사제된 이로서 착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마는 김동한 신부의 어진 성품이 남달랐다 함은 그를 아는 이들의 공통된 회고이다. 그렇다 하여도 착하다는 성품 하나로 하여 사제된 분을 기리고 추모하기에는 좀 무엇한 마음이 없지 않다. 하기사 세상은 착한 이를 노상 바르게만 보기보다는 바보나 못난이와 동일시하기를 서슴지 않는 인심인지라, 평생을 착하게만 처신하기도 짜장 쉬운 일은 아닐 듯싶다. 하나 아무렴 그 때문에 김동한 신부의 생애가 두드러지는 것은 아닐 줄 안다. 그것은 차라리 바보스럽도록 넉넉한 심성이 바탕이 되어 그의 삶 속에 구현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모습 때문일시 분명하다. 특히나 생애의 마지막 십 수년 동안 결핵 사업에 쏟은 헌신적인 삶이야말로 후세가 기리고 추모하기에 충분하리라.

큰 중이 될 아이

김동한 신부는 1919년 6월 25일 경북 금릉군 직지사(直旨寺) 입구의 옹기굴 동네 지대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김영석(요셉)은 본래 충청도 연산 사람으로 병인박해(1866년) 때 순교한 김보현(요한)의 유복자이다. 대구에서 달성 서씨 중하(말지나)와 혼인하여 5남 2녀를 두었는데 여섯째가 김 신부이다.
김 신부의 이름은 어느 스님이 지어 주었단다. 김 신부가 태어나자 김천 장에 가서 미역 등 산구완을 위한 물건을 사 들고 총총걸음으로 올라오는 그의 아버지를 누가 부르더란다. 돌아보니 웬 낯선 스님이 다가와 하는 말이 “보아하니 득남한 것 같은데 이름을 동한(東漢)이라 부르시오. 이다음에 큰 중이 될 것이오.” 아버지 김영석은 스님의 말을 듣고는 “이 다음에 신부가 되면 서양 중이 되는 셈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웃었지만 스님이 지어 준 그 이름을 쓰기로 했단다.

구수하고 솔직한 성품의 사제

김 신부는 열네 살 때 소신학교에 진학하여 스물일곱 되던 1945년 12월에 서품을 받는다. 51년 서른세 살 때 해군 군종 사목 개척자로 입대하여 1958년(40세)에 중령으로 예편한다.
여기서 김동한 신부의 구수하고 솔직한 성격의 일단을 보여 주는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하고 싶다. 김 신부가 입대한 당시는 한창 6․25 정쟁 중이어서 간부 후보생들은 앳된 대학생에서 교수,목사까지 다양한 직업에 나이도 차이가 많았다. 어느 날 훈련 중 휴식시간이었다. 동기생 가운데 어린 축인 한사람이 크게 말했다.
“ 김동한 후보생에게 질문이 있습니다.”
느닷없는 일이라서 김 신부는 어리둥절한데 시끌벅쩍하던 주변이 일순 조용해졌다.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 느껴졌다.
“무슨 질문이오?”
“좀 쑥스러운 질문입니다.” 하는 말이 떨어지자 몇몇이 키득키득 웃는 것으로 미루어 김 신부 모르게 무슨 약속이 있는 모양이었지만 짐짓 대꾸하였다.
“뜸들이지 말고 말해 보시오.”
“저어.....천주교 신부님들도 예쁜 아가씨를 보면 아무 생각이 안 듭니까?”
조금은 난처한 질문이 나올 것으로 짐작은 했지만 당혹스런 질문이었다. 그렇다고 호기심에 차 있는 상황을 피할 수도 없었다. 일순 정면 돌파 보다는 빗겨 가기로 작정했다.
“그렇게 어려운 주문도 아니구만…….
그런데 대답하기 전에 먼저 내 질문부터 받아 주시겠소?”
“좋습니다.”
“당신이 보기에 내가 사람이요 아니요?”
“그야 사람이지요.”
“그러면 당신은 사람이요 아니요?”
“물론 사람입니다.”
“당신은 예쁜 아가씨를 보면 유혹되는 마음이 생깁니까 아닙니까.”
“생깁니다.”
“그렇다면 대답은 자명하지 않습니까”
김 신부의 대답에 좌중에서 와- 하고 함성이 터졌다. 김 신부는 이어서 자신의 입장을 부연했다.
“여자에 대한 유혹 같은 것은 어쩌면 여러분보다 더 강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이미 결혼했거나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나는 이미 하느님께 독신을 서약한 사람입니다. 가능성 있는 쪽보다 가능성이 없는 쪽이 더 유혹이 강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런 질문이 나온 배경이 있었단다. 같은 소대에 목사 두 분이 있었는데 짓궂은 사람들이 비슷한 질문을 했더니 펄쩍 뛰더란다. 목사로서 감히 그 같은 유감이 있을 수 없다면서 단호히 부인하기 때문에, 김 신부를 겨냥하여 목사들까지 골려 줄 셈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날이후 많은 사람들이 김 신부와 가까워졌을 뿐 아니라 전교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해군에서 제대한 이듬해 김 신부는 미국 유학을 떠난다. 보스톤 포담 대학에서 교육 철학을, 뉴욕 성 요한 대학에서 교육 행정을 전공하여 63년(45세)에 석사 학위를 받아 고국으로 돌아온다.

비극적 결핵 인생들과의 만남

김 신부가 귀국하여 사목 일선에 복귀한 곳은 경산성당이었다. 64년 마흔여섯 살 때였다. 김 신부는 본당 관내에서 결핵 환자를 하나 둘 돌보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의 생애의 마지막을 결핵과 묶는 계기가 될 줄은 성령만이 알고 계셨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올림픽을 개최했다고 뽐내고 있지만, 결핵에 관한 한 아직도 후진국 중의 후진국이다. 보사부와 대한결핵협회가 90년도에 실시한 제6차 결핵 실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 국민(5세 이상)의 1.8퍼센트인 72만 명이 결핵을 앓고 있다. 국민 60명에 한명 꼴이다. 이웃 일본이나 대만은 10년 전에 각각 0.3퍼센트와 1.7퍼센트였고, 싱가포르는 그때 벌써 0.8퍼센트였음을 상기한다면 우리의 후진성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김동한 신부가 경산본당에 있을 당시인 1965년도에 처음으로 보사부가 세계보건기구(WHO)의 지원을 받아 전국 결핵 실태 조사를 했는데, 그 결과 전 국민(5세 이상)의 5.2퍼센트가 결핵 환자로 발표되었다. 이는 인구 백 명 당 다섯 사람이 결핵 환자 꼴인 셈이다.

그때는 지금보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 여건이 훨씬 어렵던 시기여서 본당 차원에서 결핵 환자를 돌본다는 일이 무척 힘겨웠을 것이다. 가난한 환자에게 약도 구해 주고 때거리를 장만해 주는 일도 어렵겠지만, 가족들조차 꺼리는 병 때문에 외로운 환자들을 방문하며 위로와 격려를 해주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처음에는 한두 사람이던 것이 자꾸 늘어나 나중에는 스무 명이나 되었으니 여간 고달픈 일이 아니었다.
결핵은 다 알다시피 공기 전염이어서, 전염성 환자의 기침이나 재채기 때 튀는 미세한 침방울에도 균이 묻어 있어 감염될 수 있다. 때문이었던지 급기야 김 신부 자신도 결핵 환자로 판명된다. 1969년, 그가 쉰한 살 때이다. 그해 경산본당에서 자인본당을 분가하고자 신축 공사를 시작했는데 지분 공사를 돌아보던 김 신부가 각혈하고 쓰러졌다. 김 신부를 진료한 의사들은 6개월 이상 그의 생존 가능성을 의심했다. 그의 치료 전망이 특히 비관적이었던 것은, 결핵도 중증이었지만 당뇨병이 겹쳤기 때문이었다.

결핵에 걸린 사제

김 신부는 그 해 11월에 마산 국립 결핵병원 내 천주교회에서 본격적인 투병 생활을 시작한다. 약 2년 동안 거기서 요양하면서 몸소 겪고 목격한 비극적 결핵 인생들과의 만남에서 사제로서 당신의 소명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김 신부는, 하느님께서 다시금 건강을 허락해 주신다면 가난과 무지 때문에 치료에 실패하여 비참하게 죽어 가는 환우들을 위해 결핵 사업에 투신할 것을 발심하게 된다.
김동한 신부가 생각한 결핵 사업은 환자들이 안심하고 투병할 수 있는 요양공간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결핵 환자를 수용할 병상은 턱없이 부족하지만, 당시는 훨씬 심각했다. 당장 입원치료가 필요한 사람은 십만 명도 넘는데, 전국의 병상 수는 국공립과 사립 그리고 육군 병원을 합쳐도 이천여 개가 고작이었다. 그 시절 마산 병원은 사백오십 명쯤 입원이 가능했으나, 무료 병동 입원은 별 따기나 다름없었다. 또 설령 입원한다 해도 입원 기간이 6개월로 제한되어 장기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은 심리적 불안을 늘 안고 있었다. 상당수 환자들은 예전에 치료에 실패했던 경험자들로서 꼭 낫겠다는 일념으로 재입원을 원한다. 그러나 재입원이 어디 쉬운 일인가. 병원 규정으로 재입원은 퇴원 후 2개월이 경과해야 신청 할 수 있었고, 신청 후 몇 달이고 병원 주변 민가에서 합숙하며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김동한 신부는 특히 이런 환자들의 비극적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재입원을 기다리는 동안 민가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 환우들의 장례를 몇 차례 치르면서, 중증 환자들이 안심하고 요양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할 결심을 더욱 다졌다.

새로운 소명

결핵 요양원 설립! 그것은 김 신부 최대의 목표였으나 아무래도 한낱 꿈일 수밖에 없었다. 결핵과 같은 만성 질병에 투자하는 일은 누가 보아도 무모한 일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자본의 논리로는 불가능한 것임을 김 신부인들 모를 리 없으련만, 한사코 꿈같은 생각을 버리지 못하였다.
1971년(53세) 5월, 김 신부는 마산을 떠나 대구에 온다. 기적과도 같은 투병 결과에 따른 것이다. 의료진은 ‘총각’인데다 ‘좋은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병이 잘 낫는 것 같다는 비의학적 주석을 붙여 사회 복귀를 축하해 주었다. 1973년 여름까지 후기 요양을 하는 동안, 김 신부는 마산시절 보살펴 준 환우들에게서 계속적으로 도움을 호소 받았고 최선을 다했다.
심지어는 균이 펑펑 나오고 열흘이 멀다 하고 각혈하는 여자 환자를 자신이 기거하는 집에 살도록 하여 돌봄으로써 오해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부모는 물론 형과 아우까지 결핵으로 사망한 환자 형제를 입원시키려고 멀리 서해 낙도인 백령도까지 몇 차례 다녀왔다. 70년대 중반까지 메리놀회가 운영하던 결핵 요양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환우들을 위한 이 같은 노력 속에 요양원을 설립하고자 하는 열망은 더욱 절실했지만 길은 막막할 뿐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방법은 오묘했다. 섭리하시는 신비는 김 신부의 꿈을 키우며 한 걸음씩 결핵 사업에 투신토록 이끌어 준다. 건강을 회복한 김동한 신부는 1973년 9월, 대구 근교 화원본당 주임으로 부임한다. 화원에는 대구교도소가 있어서 그는 교도소 사목을 겸하면서, 그곳에서 대구 쪽으로 십리쯤 들어와 자리한 대구결핵 요양원에도 공소처럼 드나들게 되었다.
당시 대구 결핵 요양원은 말이 요양원이지 수용소에 다름없었다. 이미 운영진은 투자할 기력을 잃고, 환자에게 가장 필요한 투약은 고사하고 호구지책도 시청의 구호에만 의존하는 실정이었다. 거기에는 대부분 초치료에 실패한 환자들이 재치료에 필요한 고가 약을 구입할 처지가 못 되거나, 현대 의학으로는 다시 어쩔 도리 없는 난치성 환자 70여 명이 수용돼 있었다. 그들 중에는 마산 시절 김 신부가 손수 세례를 준 환우들도 있었다.
김동한 신부는 단심으로 그들을 돕고자 했다. 물론 김 신부의 도움이란 물질적인 면에서는 간장, 된장을 얻어 오는 수준을 넘지 못하였다. 그의 도움은 오히려 정신적인 면에서 비중이 컸다. 그는 의학적으로 도저히 치료 가망이 없는 환자들에게 조약(민간요법)이나 침, 뜸까지 동원해서라도 생명의 외경스러움을 증거하는 일에 열중했다. 이러한 일들은 일면 우스꽝스러울지 모르지만 환자에게는 크게 도움이 되는 일이어서, 환자로 하여금 자신은 결코 버림받은 존재가 아니라는 인식과 함께,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잃지 않도록 하는 데 무언의 몫을 해주었다.
요양원 운영진은 처음에는 경계의 눈초리로 김 신부를 피하였으나, 차츰 신뢰하게 되고 나중에는 모든 운영권을 넘겨주고자 하는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드디어 때가 온 것이다. 막막하기만 했던 꿈이 이제 실현의 장을 펼칠 문턱에 다다른 것이다.
그러나 막상 김 신부는 번민해야 했다. 70여 명 환자들을 과연 책임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당신이 사제라는 공인(公人)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 자칫 교회에 끼칠 누까지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김동한 신부는 의논할 만한 곳은 다 찾아다녔지만, 뜻은 좋으나 현실성에 대해서는 모두가 회의적이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을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이제 그의 유일한 의논 상대는 예수, 마리아였다. 그는 며칠 밤을 홀로 성모상 앞에서 혹은 감실 아래서 떼를 쓰다시피 기도했다며 훗날 술회한 적이 있다.

멀고도 험한 사랑의 순례

김 신부는 먼저 이 일이 하느님의 뜻인지 자신의 욕심인지를 여쭈었다. 결코 자신의 허망한 꿈일 수 없다는 강한 부정을 느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말씀 드렸다.
“가장 보잘것없는 자에게 해준 것이 곧 당신께 해준 것이라고 말씀하셨잖습니까. 이 일은 반드시 당신 사업일 수밖에 없음을 믿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새로운 힘이 솟구치기는커녕 단돈 오만 원밖에 없는 주머니에만 신경이 쓰였다. 마침내 애타는 방황의 벼랑 끝에 이르러서야 그는 용단을 재촉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조금도 의심을 품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구하십시오. 의심을 품는 사람은········· 아예 주님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 1.5-8)
1975년(57세) 3월에 그는 요양원을 인수한다. 이제 그의 멀고도 험한 사랑의 순례가 시작된 것이다.
요양원의 일은 밑도 끝도 없이 소모적이었다. 구걸도 한두 번이지 무턱대고 아무데나 자꾸 갈 수가 없었다. 자연히 서울로 부산으로 일본, 미국으로 활동 범위를 넓혀야 했다. 그러자니 본당을 비우는 일이 잦았고 교구의 심려 또한 깊어 갔다. 본당 교우들의 짜증도 생길 법했다. 그런가하면 일부에서는 김 신부의 요양원 운영에 대해 무모한 일이라 비판하는 빈축도 비등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시력은 감퇴되고 수족에 마비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뇨병 후유증이었다. 이쯤해서 어지간히 물러서는 것도 좋은 일이언만, 그는 오히려 더욱 열심히 추진해 나갔다. 김 신부는 추호도 자기변명이나 주장을 강변하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그의 길을 걸어갔다.
이 무렵 김 신부에게 여러모로 힘이 되었던 사례 중 하나가 생각난다. 부산의 한 후원자가 사업이 여의치 않아 모든 것을 정리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어 위로 차 그 집을 방문하였다. 그 집주인은 김 신부를 무척 반겼을 뿐 아니라 뜻밖에도 적지 않은 희사금을 내놓았다. 김 신부는 극구 사양했지만 집주인의 말 한마디에 더 거절할 수 없었다. “신부님, 제 걱정일랑 더 안하셔도 됩니다. 그리스도의 샘물은 풀수록 고이기 마련 아닙니까·······.” 김 신부는 적어도 신앙에 있어서 프로라 할 당신보다 아마추어 격인 집주인의 믿음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풀수록 고이는 사랑의 샘물

김동한 신부는 요양원 운영의 항구적 대책으로 후원회를 구상했다. 1977년 7월 그의 활동과 노력에 안타까움을 느껴 온 몇몇 부인들이 주축이 되어 대구 결핵 요양원을 도울 ‘밀알회’가 발족된다. 이웃의 고통을 함께 덜어 주고자 하는 선의의 사람들은 종교도 국경도 초월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 동포들에게도 밀씨는 뿌려졌다. 밀알 회원은 가톨릭 신자가 가장 많지만 개신교, 불교 신자와 비신자들도 상당수가 있다. 밀알회는 ‘한 알의 밀알이 썩어 많은 열매를 맺듯’(요한 12.24) 날로 성장했다. 오늘에는 결핵 환자 시설 두 곳과 장애인 시설 두 곳 등 후원 범위를 확장할 만큼 발전하게 되었다.
이야말로 김동한 신부가 맺어 놓은 ‘나눔 생활’이 주는 활력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고 김동한 신부의 1주기 추모 미사에서 그의 동생 김수환 추기경은 이렇게 추모 강론을 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가난하고 병든 형제들을 꾸준히 돌보는 것입니다. 형님은 많은 분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또 많은 분들로 하여금 사람을 사랑하도록 하셨습니다. 형님 신부님은 당신을 사랑해 주는 것보다 당신 자신이 몸 바쳐 사랑하고 있는 환자들을 사랑하는 것을 더욱 기뻐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형님 신부님을 사랑하던 이들은 새롭게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형님은 이런 아름다운 복음을 실천하기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바쳐 일하시다가 밀알 하나가 되었습니다.”
1978년(60세) 1월에 화원본당 주임직 사임이 허락되었고, 5월에는 지금까지 교회 내에서 여기저기 필요에 따라 자생하여 온 결핵 사업 기관을 유기적으로 묶어, 서로 보완관계를 이루며 효율적 운영을 도모하고자 한국 가톨릭 결핵 사업 연합회를 조직하고 회장직을 맡는다. 그는 이 연합회가 주교회의의 인준을 받도록 무진 노력했으나 그의 사후인 1984년에야 그 결실을 보았다.
김동한 신부의 결핵 사업은 그 규모로나 연륜으로 보아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함에도 한국 가톨릭 결핵 사업의 대부 또는 선구자로 기리는 까닭은, 무엇보다 자신을 ‘작은 종’에 비기면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마태25.40)들을 돕기를 마치 ‘착한사마리아 사람’(루가11장)처럼 하고자 한 그의 실천적 삶에 있으려니와, 국민 건강에 미치는 중대한 영향에도 불구하고 소외된 결핵 사업의 자리 매김에 끼친 노력의 소산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김동한 신부의 사업은 그의 생전보다 사후에 더 뚜렷하게 발전한다. 1978년부터 계속 추진한 결핵균 음성 노약자를 위한 보호 시설 ‘사랑의 집’도 그의 사후에 그를 기념하는 뜻에서 ‘밀알의 집’으로 이름을 바꾸어 1984년에 성취되었고, 대구 결핵 요양원 현대화 작업역시 그의 사후에야 열매를 맺었다.(1985년)

시루에 붓는 물

김동한 신부의 종합적 결핵 사업계획은, 요양원 인수 후 거의 임기응변적으로 대처해 온 운영의 취약성을 극복하고 조직을 체계화하여 입,퇴원을 원활히 할 필요성에서 비롯하였다. 1978년부터는 날로 증가하는 입원 신청자를 감당하기 어렵게 되어 이미 치료는 끝났으나 갈 곳 없는 사람들에 대한 대책에 부심하게 된다.
그는 사회 복귀가 가능한 20여 명에게 대구시 당국의 협조를 얻어 정착금을 얼마씩 마련하여 퇴원케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환자들이 자활금이 적다면서 직원들에게 폭언과 폭행을 하는 불상사도 있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주면 보따리를 내놓으라는 격으로, 병약한 노구를 이끌고 구걸하다시피 얻어다 먹이고 치료해 준 보답으로는 너무 어의없는 선물이었다. 김 신부는 폭행당한 직원에게 이렇게 위로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셨지만 감사드리러 온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지 않았나·······.”
김동한 신부는 또 치료가 다된 노인 네 분을 몇몇 양로원에 분산 전출 토록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전출된 노인들은 여섯달 안에 모두 사망하였다. 그들은 신자들로서 성사도 못 본 채 캄캄한 최후를 마친 것이다.
김 신부는 노인들의 전출 조치를 크게 후회했다. 그들 중에는 82세가 된 노인도 있었다. 그 할아버지는 신부님 옆에서 임종하고 싶었다면서 눈물어린 작별을 했는데, 성사도 못보고 세상을 하직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 신부는 사제로서 또 다른 죄책감을 감수해야 했다. 이 일이 있은 후 김 신부는 노동력을 잃은 균음성(전염성이 없는) 노약자들과 치료 가능성이 부족한 균양성(전염성이 있는) 환자를 위한 시설을 각각 따로 세울 것을 계획하게 되었다. 바로 ‘사랑의 집-후에 밀알의 집- 설립계획이 그 하나이다.
‘사랑의 집’ 설립 계획은 밀알회 사업으로 적극 추진되었다. 이 사업은 한국 최초의 난치 결핵 환자 재활·보호 시설로서 정부와 아산 재단 등이 관심을 보여 지원을 약속했다.
1982년(64세) 10월, 3년여의 준비 끝에 경북 고령에 ‘사랑의 집’ 건립 부지를 확정했지만 예기치 않은 암초에 부닥친다. 결핵 환자 시설이라는 이유로 지역 군수의 완강한 반대에 맞서 거의 1년 동안 뜨겁고 험악한 투쟁을 치러 내야 했다. 그러는 동안 김 신부의 시력은 이미 장님에 가까웠고 손과 발의 마비 현상은 행보가 어렵도록 악화되었지만 그의 활동은 지칠 줄 몰랐다. 건강 상태가 그 지경임에도 별 성과가 없어 보이는 사업 추진에 동분서주하는 그의 모습을 안쓰럽게 느낀 한 교우가 이렇게 권했다.
“신부님, 시루에 물 붓기예요. 이제 좀 그만 쉬셔요.”
“이 사람아, 그 시루에서 콩나물이 자라는 것을 왜 모르시나········.”

소외당한 삶일지언정

그러나 언제까지고 당신의 ‘작은 종’ 김동한을, 밑빠진 독에 물만 붓는 어리석은 일에 혹사할 하느님이 아니셔서 1983년(65세) 8월 그로 하여금 끝내 자리에 눕게 한다. 그의 병세는 위중하여 9월 22일 서울 강남성모병원에 입원한다. 9월 25일, 세계주교회의 참석차 로마로 떠나는 동생 김수환 추기경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형님, 다녀오겠습니다. 약 40일 걸릴 겁니다. 그때까지 꼭 회복되도록 하세요.”
“걱정 마시고 잘 다녀오시오. 당신 돌아오실 때는 내가 걸어 다닐께요.”
그러나 이것이 사제의 길을 같이 걷던 형제의 마지막 작별이었다. 김동한 신부는 9월 28일 하오 2시 폐수종 병발로 영원한 하느님 품에 안겼다. 9월 30일 생전에 온 몸과 마음을 다하여 사랑한 요양원 환우들과 많은 밀알회원들의 오열 속에 대구대교구 성직자 묘지에 마련된 유택에 안장된다.
‘HODIE MIHI CRAS TIBI'(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
대구 성직자 묘소의 정문에 새겨진 라틴어 성구가 새삼 장례에 참석한 이들의 옷깃을 여미게 했다.
이제 김동한 신부는 고통의 이승을 떠났지만 그가 생활한 행적과 정신은 남아서 구수한 그의 체취와 더불어 오늘도 거절당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사랑 속에 믿음의 삶을 살도록 맥맥히 이어진다.
한 인간에 대한 공정한 평가는 매우 어렵다. 김동한 신부에 대해서도 이 같은 점을 저어하여, 그와는 삼십년 지기로 벗해 온 시인 구상 선생의 추도사 한 대목을 굳이 사족으로 인용하고자 한다.
“솔직히 말하여 그 생애는 그분의 자질이나 능력에 비해 언제나 현실적으로는 성공적이라기보다 불우한 편이었고, 교회 안에서도 소외당하고 있던 편이라 하겠다. 그러나 신부님은 그 많은 실의와 좌절 속에서도 그 순수한 이상(지향)을 잃지 않으시고 더구나 하느님께 향한 의탁을 버리지 않으셨다. †

자료제공 천주교대구대교구 사회복지후원 밀알회강찬영신부님 회고록